Sun&Moonのリンク

自叙伝・・・・これはある人に宛てた手紙です。

                                    

제가 쓰키하라를 만나게 된 사연(1)
게시일 : 2000/09/10 (일) AM 06:31:23 (수정 2000/09/14 (목) AM 09:32:18)

혜원 권유를 받아 제가 사랑하는 사람(쓰키하라)을 만나게 된 사연을 쓰고자 합니다.
1992년 5월 저는 전 남편(존 영국사람)과 아들(1989년생 미네아키), 그리고 배 속의 아이(가즈)와 저의 친 부모님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월 9일에 시꼬꾸에 계시는 후꾸오까선생님(자연농법가) 농장에 한국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 사람이 제가 번역한 책을 읽었다면서 말을 걸어 왔는데 조금 아야기를 해 보고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말이 척척 통합니다. 제 말 뜻을 100% 이해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하고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름은 쓰키하라, 1966년생이니까 저보다 7살 아랜데 나이 차이는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쓰키하라와 만난 후 며칠 지나니까 저는 갑자기 그를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어졌습니다. 그제서야 제가 그를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자각한 것입니다. 6월 1일에 그가 저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저는 미네아키와 배속의 아이와 함께 그를 마지했는데, 그의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 저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간신히 버티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그도 시오다씨가 좋으니까 왔다고 했는데 그 때 두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게 마지막이구나 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로서는 당연히 이승에서의 인연은 없다고 체념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날 밤에 저는 미네아키를 재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아들 앞에서 운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오늘 엄마가 울어서 미안해."
"엄마는 왜 울었어?"
"글쎄 왜 울었을까?"
"그거는 누군가가 돌아왔기 때문이야."
"뭐? 누군가가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그래."

그 충격적인 말을 남기고 겨우 만 세살인 어린 아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게도 아들은 그를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쓰키하라한테 편지로 썼는데 답장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에게로 진정으로 돌아갈 날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저승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지요.

1992년 9월에 저는 둘 째 아들, 가즈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전후해서 저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멀리 떨어져 있고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갑자기 그가 찾아와서 저를 안은 것도 느꼈습니다. 물론 육체는 없지만 틀림없시 그의 몸을 느낀 것입니다. 그가 남자로서 저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 뼈져리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마치 제가 남자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그 사람한테서 온 메세진지 아닌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자칫하면 남편도 아이도 버리고 그에게 가 버리려고 하는 저 자신을 저는 억지로 참았습니다. 저는 점점 둔감해지고 에너지를 고갈시켜서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사랑의 샘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지옥처럼 가혹한 나날이었습니다. 자기가 낳은 애기조차 사랑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왜? 사랑의 샘을 다시 열어 버리면 당장 쓰키하라한테 가 버릴까 봐. 사랑의 샘의 근본에 쓰키하라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니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돼 버린 것입니다. 자기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저는 압니다. 저는 자기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틀림없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두려워서 그렇게 됐을 것입니다.

저는 점점 쇠약해져서 나중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졌습니다. 맨날 천정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애기한테 젓을 줄 수도 없고 그렇게 지키려던 가족한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짐만 되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매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갓난애기를 두고 죽어야할 엄마 심정이었습니다. 쓰기하라를 사랑한 것이 이렇게 큰 잘못이었을까? 그러나 그를 정말 사랑했을 때에는 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사랑이 왜 이런 결말을 낳아야 하나...

저는 어쩔 수 없이 남편한테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남편한테 상처를 주기 싫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너무 지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남편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모든 것의 해결의 실마리였던 것입니다.

남편은 제가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 말을 성실하게 받아 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교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어떻게 해 줄 길이 없어.

그 후에 혜원이 찾아와서 큰 선생님이라는 분의 도움을 받고 제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절망 속에서 7개월 동안 앓았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몸은 회복됐지만 문제의 뿌리는 여전해 남아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다시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만나서 부딪혀 보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1993년 10월 혜원이 일본에 온 기회에 저는 1년 2개월 만에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그동안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거든요.) 오랜만에 만난 그는 놀랄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나는 당신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라고 그는 잘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만난 혜원의 말은 달랐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는 그저 철저히 참고 있을 뿐이야....

바로 그 상태가 저에게는 제일 힘든 것입니다. 저는 그의 괴로움을 바로 느낄 수 있는데, 그가 계속 그런다면 저는 다시 병이 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저는 기꺼이 그를 포기했을 거에요. 제가 그를 만나서 간절히 바랬던 것은 오직 그의 행복이뿐었으니까요.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데도 자기는 행복하다고 우기는 그를 그대로 둘 수는 절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저는 쓰키하라한테 긴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 쓰고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도 다 쓰고난 다음에 제발 좋은 사람 만나서 빨리 결혼해 달라고. 그가 혼자 있으면 저는 정말 괴로워서 못 살 것 같았습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12월 16일, 바로 저의 생일이었습니다. 저는 동경 한복판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습니다. 저도 그도 너무 놀랬습니다. 우리는 잠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가 저를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를 느꼈습니다. 물론 입으로는 그런 말을 안 하죠. 그러다가 그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후는 편지고 전화고 모두 거절을 당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와 만난 날 저는 존 씨한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다 솔직하게 말할 테니까 용서해 달라고. 존씨는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혜원의 권유를 받아서 아봐타코스를 밟은 것이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습니다. 94년2월에 한국에서 코스를 밟았고 3월에 미국에서 마스타코스를 밟았습니다. 제가 첫번째 일본 마스타가 된 셈입니다. 저는 어떻게 그를 만나지 않아도 혼자 이 문제를 해결 할 길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봐타를 해도 제 마음은 전혀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와 직접 부딪혀 보지 않으면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봐타를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94년 6월 저는 일본에서의 첫번째 아봐타코스는 열게 됐습니다. 일본에는 마스타가 저밖에 없으니까 내가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때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오셔서 도와주셨습니다. 혜원도 오고 취산 선생님도 오시고... 그때 학생으로는 도시코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미친 일본 남자도! 실은 이 미친 사람 때문에 별 이상한 일들이 다 벌어졌습니다. 그 때 계셨던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요. 마치 다른 차원의 일같은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저는 그 미친 사람 덕분에 아주 큰 일을 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스 중에 제가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네아키가 갑자기 아빠한테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엄마는 너무 바쁘니까 난 둘 째 엄마가 필요해."

애 아빠는 그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만약에 애도 좋고 자기도 좋은 여자가 있으면 교코를 해방시켜 주자. 그래서 세 여자의 이름을 들었답니다.(다 제 친구들입니다) 애는 첫번째 여자는 키가 작다고 했습니다. 둘째 여자는 한국 사람인데 애는 일본 여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세 째 여자가 바로 ◯◯코씬데 한국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아시는 분도 계시겠죠? 애는 그 사람은 엄마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그때 애 아빠는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코씨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었는데 이상하게 애가 유난히 좋아했었습니다.

저는 남편한테 물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어때요? 당신은 ◯◯코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남편은 실은 처음 만났을 때 아주 매력적이라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하늘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구나. 저는 그 때까지 유부년인데도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 제가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한테 진짜 짝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제가 결혼 상대를 잘못 골랐다면 남편도 마찬가지로 잘못 골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남편을 떠너야 남편이 진짜 짝을 만나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행복이 바로 다른 사람의 행복이라는 이야기죠. 그랬구나. 저는 행복을 포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포기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괴로운 나날은 바로 제가 행복을 잡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편과 헤어지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코씨한테 전화를 걸었죠.

" 우리 남편하고 결혼해 줄래?"

◯◯코씨는 너무 놀라서, 어이없어서 화를 냈습니다. 자기 문제를 남에게 떠넘기지 말라고 하면서. 하지만 저는 그 때 ◯◯코씨가 너무 크게 화를 냈기 때문에 오히려 희망을 느꼈습니다. 틀림없이 존씨한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그래서 저는 존씨와 이혼하기로 하고 존씨가 재혼 할 때까지 동거하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부모님이 격분하셨습니다. 왜 헤어졌는데 같이 사느냐? 같이 살 거라면 헤어지지 말라고. 부모님으로서는 그게 당연한 주장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안 맞는 이야기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7년간 결혼 생활에서 가장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행복을 빌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이혼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혼할 때 가장 사이가 좋았습니다. 존씨와는 지금도 아주 친한 친구입니다.

◯◯코씨는 우리가 이혼했다는 소문을 듣고 아주 놀란 모양이었습니다. No라고 했는데 우리가 이혼해 버렸으니까요. 94년12월16일, 바로 제 생일에 ◯◯코씨는 저에게 전화를 해 주었습니다. 존씨를 만나 보겠다고. 대단히 용기 있는 결정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하여튼 존씨와 ◯◯코씨는 그 날에 첫 데이트를 하고 두 사람 사이는 갑자기 가까워졌습니다. 95년3월에 두 사람은 드디어 결혼했습니다.

그 때 미네아키가 또 이런 말을을 했습니다.
"나는 옆집에 이사가고 싶다."

그 때 옆집은 빈집이었습니다. 저는 존씨가 옆집에서 애들하고 같이 살아 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한테 상의를 했더니 두 사람 다 괜찮다는 거에요. 그래서 존씨가 엎집에 이사가고 ◯◯코씨가 이사왔습니다. 미네아키는 스스로 자기 장난감을 챙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빠를 따라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미네아키는 둘째 가즈는 아직 어리니까 당분간 엄마하고 같이 자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즈는 낮에는 옆집에서 지내고 밤에는 저하고 자는 생활을 했는데 가즈만이라도 제가 데리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저는 미네아키한테 야단맞았습니다.

"엄마, 가즈도 보내야 해!" 그래서 그 날 밤 가즈를 데리고 가서 ◯◯코씨한테 가즈를 부탁한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 날부터 일주일 정도는 가즈가 집에 가고 싶다고 울었는데 그 때마다 미네아키가 가즈 집은 여기라고 야단쳤다고 합니다. 일주일 지나니까 가즈는 완전히 옆집 식구가 됐습니다. 애들은 낮에는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롭게 놀았습니다. 물론 돌아갈 집은 아빠 집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부무님이 또 격분하셨습니다. 왜 헤어진 사위가 엎집에 사느냐고. 그렇지만 저는 애들을 위해 이것이 최선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부모님도 할 수 없이 허락하셨죠. 그런데 ◯◯코씨가 정성껏 애들을 돌보아 주는 모습을 보시고 부모님 마음이 바뀌셨습니다. ◯◯코씨는 정말 좋은 엄마다. 너보다 훨씬 낫다고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납득이 안 가는 주변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어느 이웃은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오다씨 엎집에 바깥양반과 꼭 닮은 사람이 이사왔는데 그 분은 진척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본인입니다. 그럼 여자 분은? 새 부인입니다! 이웃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겠죠.

그렇게 해서 저는 자유로운 홀몸이 된 것입니다.

쓰키하라는 어떻게 됐느냐고요? 그 이야기는 내일 하겠어요.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마지막에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행복을 포기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모든 사람을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니까요. 항상 스스로에게 정직하세요.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칠 우려가 있어도 상처를 줄 우려가 있어도 항상 솔직하세요. 자신한테 거짓이 없이 솔직하면 모든 상처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납니다. 진실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진실만이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입니다. 진실만이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교코

제가 쓰키하라를 만나게 된 사연(2)

게시일 : 2000/09/11 (월) AM 11:49:24 (수정 2000/09/14 (목) AM 09:46:34)

오늘은 저와 쓰키하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쓰고자 합니다. 조금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있을지 모르지만 저에게 닥친 일들은 사실대로 숨김없이 쓰겠으니 이해해 주세요.

쓰키하라가 저에게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털어 놓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처음 만났을 무렵이죠. 그 때는 제가 유부녀인데다 임신중이라 그는 경계를 늦춘 무방비상태였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고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인연이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까워질 수도, 진정으로 만날 수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은 정말 큰 사건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주번 사람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이르킵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93년 10월에 혜원과 함께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끝까지 차가운 태도를 지키다가 전철역에서 헤어지게 직전에 우리한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제가 전철을 타고 전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는 제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하고는 영원히 못 만나겠구나 라는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랬습니다. 그의 태도는 항상 그랬습니다. 차가운 말을 던지고 내정한 태도를 지키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눈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포기하지 말라고.

93년 12월 16일 동경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어떤 학자가 우연은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든다고 하더군요.)쓰키하라와 저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아주 아플 때 이야기)

" 그 때 저는 이승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어요. 다만 애들을 위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애를 위해서 살고 싶다는 것도 사실은 저의 에고일 것입니다. 그래서...... "
"계속하세요."
"그래서 저는 제가 살고 싶은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서 어떻게 살고 싶은 거에요?"
"영원히 같이 있고 싶습니다."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아주 놀랬습니다. 그의 사랑은 저보다 훨씬 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같이 떨어져 가면 큰일이 난다, 집에서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저는 그만 중간에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죄송해요"

그 후 그의 열리던 마음이 다시 굳게 닫쳐 버린 것입니다. 열리다가 닫쳐 버린 마음을 다시 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래요. 다 제가 겁이 나서 돌아선 탓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 후 94년 6월까지 저의 편지나 전화는 모두 거절당하고 길은 완전히 막혔습니다. 그런데 94년 6월에 일본에서 열린 첫 아봐타코스 때 일이 뜻밖의 방향으로 커지게 됐습니다.

그 때 미친 일본 남자가 왔다는 이야기는 저난 번에도 썼습니다만 그 사람 덕분에 코스는 파란만장했습니다. 그 남자는 쉽게 말해서 귀신이 든 상태였습니다. 코스가 진행되면서 차츰 귀신이 정체를 들어내기 시작했는데 많은 마스타들이 코스의 성공을 위해서 그 사람을 내쫓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학생이니까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장담했지요. 자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예요. 그랬더니 저에게 아주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저한테도 무슨 귀신이 든 것을 느낀 거에요. 그런데 그 귀신은 그 학생의 귀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데 제 몸이 저절로 움직여서 마치 중국무술 스승(여자!)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마 그 귀신은 학생 귀신의 애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굳은 남자를 풀어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자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나중에 Starsedge에서 제가 마스타 규정을 어겼다는 시비가 많았다고 들었지만 저는 분명히 말하건데 Serious drill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은 다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코스를 하고 있는 집 전체에 강력한 에너지가 꽉 차 있어서 마치 다른 차원과의 통로가 된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코스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도시코는 코스는 다 그런 줄 알고 나중에 해 본 코스가 심심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빠져나간 남자가 코스 마지막 날에 갑자기 행방불명이 돼 버렸습니다.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밤이 되고 나서 그 남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단 한마디의 전화였습니다.
"교코씨,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전화 번호"

그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일단 마음이 놓였습니다.

다음날(1994년 6월 13일) 아침 그 남자한테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정상적인 전화였는데 내용은 오늘 안으로 반드시 고이 선생님께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이(Goi Masahisa) 선생님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단체를 만드시고 이미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아주 절박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혜원과 함께 애들을 데리고 고이선생님이 만드신 단체의 본부(이치카와시)를 찾았습니다.

도착하니까 혜원도 저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큰선생님의 동작처럼. 본부 안에 있는 연못까지 가니까 돌연 제 머리 꼭대기에 뭔가가 꽝! 떨어졌습니다. 저는 갸야야야야 라고 외치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진짜 무당처럼 말입니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어요. 저는 무당들이 소리지르는 심정을 압니다.

애들과 혜원한테도 무언가가 내린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후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들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으니까요.

그 때 저의 상태는 이랬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다 아는데 다만 무엇을 하려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는 상태. 다시 말하자면 완전히 깨어 있는데 행동은 완전히 하늘?에 맡긴 상태라고 할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일뿐이었습니다.

저는 고이 선생님이 세우신 건물 앞에 섰습니다.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는데 당당하게 들어갔습니다. 앞에 고이 선생님의 큰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제 손이 큰 불럭을 잡고 갑자기 그 사진을 향해 던졌습니다. 사진이 찢어지는 순간 저는 "그만해요!"라고 소리질렀습니다.(이 때 주체는 분명히 저였습니다.) 그 때 무언가가 제 안이서 속삭였습니다.

"강해져라! 강해져라!"

저는 그 말에 힘입어 계속 불럭을 던져서 사진을 부숴 버렸습니다. 무언가가 또 속삭였습니다.

"죽어라!"

저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힘껏 살아와서 하늘이 죽으라고 한다면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또 애들한테도 새 엄마가 생길 테니까 후환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죽겠습니다! 라고 했지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 말은 육체적으로 죽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죽음을 각오할 필요는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다 하늘에 맡기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건물에서 나와서 혜원과 애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혜원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죽어야 한다. 애들을 부탁한다."
미네아키는 많이 울었지만 저는 잘라 말했습니다.
"너의 엄마는 ◯◯코다!"

그것은 미네아키 스스로가 며칠 전에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짱이 큰 가즈는 울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짐을 다 혜원한테 맡기고 혼자 떠났습니다. 물론 어디 가려고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혜원이 어린 애들을 데리고 어떻게 집에 가야 될지 몰라서 아주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미네아키가 한자를 읽을 줄 알아서 간신히 집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고 혜원,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저는 조금 걸어 가다가 택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모리토 갑시다!"

놀랍게도 노보리토는 쓰키하라 주소였습니다. 나는 쓰키하라를 만나러 가는구나! 하늘이 나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쓰키하라한테 가라고 하는구나! 저는 돈 한푼 없이 유유하게 택시를 탔습니다. 노보리토는 거기서 세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로 요금도 2만엔 이상 나옵니다. 기사님은 저를 의아한 표정으로 보면서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드디어 제 인생 최대의 모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계속)

제가 쓰키하라를 만나게 된 사연(3)
게시일 : 2000/09/11 (월) PM 04:06:38 (수정 2000/09/14 (목) AM 10:10:52)

택시 안에서 저는 잠시 누웠습니다. 노보리토가 가까워지니까 기사님한테 길을 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쓰키하라 주소는 알고 있었지만 집에 가 본 적이 없어서 길을 물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상황은 아니었죠.

한참 가다가 기사님이 물었습니다.
"손님, 이 길이 정말 맞습니까? 아까부터 똑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데 "
"아 그런가요?"
"손님, 돈이 있어요?"
"없어요."
"돈이 없다고요? 그럼 경찰소로 갑시다."
"예, 그러세요."

그래서 저는 요코하마에 있는 경찰소로 끌려 가게 됐습니다. 경찰소에 잡혀간 저는 여러가지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저의 대답을 종합하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저는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니까요.
(아니 어떤 차원에서는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쓰키하라와 2년 동안 동거를 하고 있는데 그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 홧김에 집을 나왔다. 이치카와까지 걸어갔는데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중이다."

경찰관은 쓰키하라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물었습니다. 주소는 생각났는데 전화번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그 때 갑자기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봐타 코스의 남자 전화 말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전화번호."

경찰관은 할 수 없이 쓰키하라 집까지 찾아갔습니다. 여자를 보호하고 있으니 같이 와 달라고. 쓰키하라는 놀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장 저인 줄 알고 저의 본명, 주소를 다 경찰관에게 말한 모양입니다. 연락을 받은 경찰관이 저보고 말했습니다.
"너 거짓말 했지!"

경찰이 부모님 계시는 우리 집으로 연락을 했습니다. 집에서는 다들 걱정을 하고 야단났었습니다. 제가 돈도 없이 행방불명이 돼 버렸으니까요. 존씨가 당장 데리러 가겠다고 나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경찰관이 남편이 택시를 타고 올테니 올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미 12시가 다 돼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경찰소에서 멍하니 TV를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뉴스 속보가 들려왔습니다.
"긴급 뉴습니다. 북조선 정부는 만일 일본 정부가 경제 제재를 취한다면 그것을 북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뭐? 선전포고? 그렇다면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저는 그동안 코스를 하느라 국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아주 놀라기는 했지만 그 때는 아직 그것이 저하고 상관이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드디어 존씨가 찾아 왔습니다. 존씨는 기사님한테 돈을 주고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 때 제 입에서 영어로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안 돼! 지금 당장 쓰키하라를 만나러 가야 돼. 지금 쓰키하라를 만나지 않으면 북한이 일본을 공격할 거야. 전쟁이 일어날 거야."

존씨도 말하고 있는 저자신도 너무 놀랬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절박하다고 느낀 존씨를 제 말을 믿어 주었습니다. 아이고, 고마운 존씨!

우리는 다시 다른 택시를 잡고 노보리토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길을 지시하고 있더니 또 기사님이 이러는 것입니다. "손님, 이쪽은 노보리토가 아닌데요." 그래서 저는 노보리토로 가지 말고 제가 가자는대로 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비지네스 호텔이 나타났습니다. 밤이 깊어서 거의 모든 창은 캄캄했는데 4층의 한 군데만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저는 "저기다!" 라고 외쳤습니다. 12시가 지나서 이미 호텔 문은 닫쳐 있었습니다. 저는 밤새도록 호텔 주위를 빙빙 돌면서 지켰습니다. 존씨도 같이 있어 주었습니다.

새벽 4시경에 신문배달의 틈을 타서 저는 호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호텔 사람한테 너무 피곤하니 한숨 자게 해 달라고 했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오늘은 방이 꽉 찼으니 일층 소파에서 쉬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쉬다가 호텔 사람이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4층으로 올라 갔습니다.

4층에는 방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아까 불이 켜져 있었던 방으로는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 방에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둥둥..... 엉뚱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둥둥..... 아이고 미안합니다. 아마 쓰키하라한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째튼 새벽에 제가 깨워 버린 손님들, 죄송해요.....

문제의 그 방까지 갔을 때 저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문을 발로 세게 차면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쓰키하라, 나와라!"

그리고 네가 정직하지 않으니까 전쟁이 일어난다고 큰 소리로 야단쳤습니다. 존씨가 와서 저를 달래려고 하니 저는 존씨한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쓰키하라한테 무언가 말해 달라고. 그랬더니 존씨가 문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쓰키하라씨, 교코를 돌려줄테니 용서해 다오."

아이고, 너무 너무 고마운 존씨!

그 날 분명히 그 방에 손님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쓰키하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나는 쓰키하라가 아니니까 그만 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 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경찰이 왔습니다. 존씨는 경찬관과 저 중간에서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존씨로서는 어느 쪽 편도 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편에 서면 저와 같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경찰 편에 설 수도 없었으니까요.

저는 네가 정직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외치면서 또다시 경찰에 끌려 갔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큰 고비를 넘겼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찰에 끌려 간 저는 또다시 심문을 받았는데 존씨라는 보호자가 있어서 이외로 빨리 풀려났습니다. 그 때 존씨가 제 신분(니쇼각샤 대학 전임강사)을 다 밝혀 버려서 저는 당연히 학교를 잘릴 거라고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경찰관들이 저같은 미친 사람이 대학교수라고는 믿지 않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후 그 동네를 헤메다가 마침내 쓰키하라 집을 찾았습니다. 그 때는 이미 신통력이 거의 없어져 있어서 저는 우편배달부한테 길을 물어야 했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의 집 앞에서 드디어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존씨가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1994년 6월 13일 밤부터 6월 14일 새벽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때 저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존씨만 빼고 믿어 주지 않았지만요. 나중에(1996년 10월) 어떤 계기가 있어서 당시 하시모토 수상 비서관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비서관이 그 때 비상사태의 극비 회의가 열렸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텐데... 라고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느낌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쓰키하라와 북한. 그 때까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 너무 닮았습니다. 슬플 정도의 순수함. 불쌍할 정도의 자제심.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모습. 똑같습니다. 그들은 같은 파장을 타고 움짐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관계는 바로 남북관계였던 것입니다. 1992년 5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남북 관계는 유난히 좋았습니다. 우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과 동시에 남과 북도 멀어져갔습니다. 저는 쓰키하라와의 문제가 저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기야 그것은 당연한 일이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결돼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지식으로, 머리로 안 게 아니라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저와 쓰키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남녀관계의 문제입니다. 쓰키하라와 저는 그저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남녀의 조화, 음양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남녀가 정말로 조화를 이루면 전쟁도 없앨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혼을 결심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제가 그토록 용감하게 나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1994년 10월 저는 쓰키하라를 만났습니다. 이 때도 순순히 만나 주지는 않고 별 이상한 수를 다 써서 만날 수 있었는데 쓰키하라는 만나자마자 저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저는 아픔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다 풀어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사랑하는 쪽을 택하지 않고 때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가 갈아앉은 다음에 저는 여려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6월달의 이야기, 북한 이야기....그는 믿어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말고 하지 않고 이야기는 다 들어 주었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껴안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기다려 줘.... 그가 마지막에 "나는 네가 강요를 하는 한 아무것도 안 하겠다" 고 했을 때 저는 약간의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되돌아왔습니다. 무슨 암묵의 합의가 아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요. 그 이틀 후인가 미국과 북한 사이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미조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경수로로 변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전쟁이 아니라 협조로 가는 길이 처음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그 날부터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일일지도 모르고 100년후 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믿어야만 했습니다. 반드시 만날 수 있다고. 만약 제가 포기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마다 한반도 1000만 이산가족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제가 포기해 버리면 너무 많은 사람이 불행해진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행복은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됐든 상관 없겠지 같은 생각은 절대 버려야 합니다. (계속)

제가 쓰키하라를 만나게 된 사연(4)
게시일 : 2000/09/11 (월) PM 10:24:09 (수정 2000/09/14 (목) AM 10:28:10)

1994년 10월부터 1999년 8월 9일까지 저는 쓰키하라를 만나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거의 5년 가까이 못 만난 셈이죠.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그보다 7살이나 나이가 많은 저는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많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1996년 말까지 보낸 편지는 되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후는 어디 이사갔는지 알 수 없어서 어머님이 계시는 집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저를 싫어하셔서 (낡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 이혼한 여자는 어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가정은 굉장히 복잡해서 그는 가정의 따스함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자랐다고 저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보낸 편지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반년 이상 편지를 안 쓰다가 어떤 때는 매일같이 쓴 적도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가 막힐 때마다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편지를 부치면 막힌 관계가 풀리곤 했습니다.

물론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바로 복한 소식이었습니다. 북한의 모습을 보면 그의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의 식량난이 전해졌을 때 저는 무첨 가슴이 아팠습니다. 굶주리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사랑을 갈망해서 굶주리는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성욕은 식욕과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괴롭게 살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가 저에게 마음을 열어 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꿈에 메세지 같은 것이 나타난 적도 있었습니다. 방 바닥을 메운 엄청나게 많은 편지들. 다 저 앞으로 쓰다가 만 편지들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제발 나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꿈을 꾼 후에 저는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포기하지 않아요. 포기하지도 않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포기할 수도 없어요. 그것은 이미 다 아는 일이 아닌가." 때로는 밤 중에 이상한 무언 전화가 걸려 오기도 했습니다. 또 1998년 여름경에는 밤에 유체 같은 것이 와서 제 다리나 손을 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그의 메세지일 수 있고, 또 메세지라고 믿고 싶었지만 증거가 없었습니다. 누가 그것은 다 네 환상이라고 하면 반론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증거없이 그의 사랑을 믿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엇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나날은 헛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인내 덕분인지 날마다 저의 에너지가 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대학 강의마다 이혼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와 꼭 맞는 짝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고 많이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짝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정직함 뿐이라는 것, 정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노력이 아니라 용기라는 것. 저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직함 쪽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대학 학생들은 아직 사회에 얽매이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흡수가 빨랐습니다. 때로는 학생들과 격론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남학생들은 제 아야기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들과 보다 깊은 데에서 논쟁을 버릴 수가 있었고 쉽게 저를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훨씬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학생들은 코스를 밟지 않아도 다 아봐타입니다. 다 제 발로 걷어가고 있고 때로는 제에게 아주 귀중한 조언도 해 줍니다.

제 주변에 나타난 학생들은 어떻게 보면 다 쓰키하라의 분신이었습니다. 다 어떤 부분에서 쓰키하라를 닮았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민을 듣고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동시에 쓰키하라의 같은 문제도 해결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랬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 대표선수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면 다른 사람들의 같은 문제도 동시에 해결된다고. 우리는 다 세상의 문제를 하나씩 담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자기 문제를 착실히 해결해 나가기만 한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제가 지치고 힘이 없을 때는 학생들이 이런 말들을 해 주며 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쓰키하라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선생님, 저는 쓰키하라씨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어요. 빈 병에 동전을 잔뜩 넣은 사람이 동전을 꺼내려고 갑자기 병을 뒤집었는데 막혀서 나오지 않는다." ( 진짜 그렇구나. 아이고 얼마나 답답할까?)
"쓰키하라씨가 지금 막 마음을 열려고 하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98년 봄 제가 너무 힘들었을때)
"쓰키하라씨는 선생님을 무척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100프로라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물러서면 안 돼요. 한 발이라도 물러서면 다시는 절대로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99년 7월)

99년 7월에는 저는 쓰키하라를 만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실은 쓰키하라가 마음을 열기 전에는 만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쓰키하라가 마음을 열기 위해 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계기를 준 사람이 바로 마지막 조언을 해 준 남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저하고 같이 쓰키하라를 만나러 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쓰키하라가 오사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낸 상태였습니다. 신간선을 타고 먼 길을 같이 가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은 "선생님을 도와 드릴 수 있으면 제 인생도 변할 것 같아서" 라고 말했습니다. 8월 9일에 차표까지 마련한 상태에서 저는 약속한 신간선 차 안에서 그 학생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 학생이 제 등을 밀어 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8월 9일의 만남이 어떻게 됐는지 자세히 말하면 또 길어지니까 한마디로 하면 저는 완전히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너무 가혹한 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5년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는데 제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자기가 7년전에 저에게 쓴 편지 내용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낸 편지는 다 읽었다고 했습니다. 하여튼 그 거절은 일종의 secondary의 과장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제가 깊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 뻔한데도 말입니다. 상처를 피하면 앞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8월 12일에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울면서 이벌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언가 벽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8월 13일에 북한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제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12월 16일, 12월 24일, 3월 14일 등 여러번 고비는 있었지만 저는 새쳔넌에는 일이 반드시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엄마한테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려선지 3월말에는 1997년부터 아키타(동북자방)에서 아빠하고 같이 살고 있던 미네아키가 갑자기 엄마하고 같이 살고 싶다고 돌아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들은 지금도 저를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도와 주고 있습니다. 쓰키하라가 어디 사는지 여전히 모르고 또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지만 저와 쓰키하라 사이에는 강한 에너지가 오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정상 회담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변화는 점점 빨라질 것입니다. 제가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날이 곧 올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우리는 만나면 금방 하나가 될 거에요. 이렇게도 기다렸는데. 그러니까 남북 통일도 금방입니다.

한반도는 지구상의 음양의 조화의 상징입니다. 음양이 조화되면 엄청난 힘이 나옵니다. 그것은 세계를 놀라울 정도로 크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계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음과 양이 극과 극에서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이런 비극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진짜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저는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깊은 상처를 간직해 오신 어려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상처를 씻어 버릴 때가 왔습니다. 행복하십시오.

교코

후기: 쓰키라하의 쓰키는 달이고 교코는 한자로 쓰면 금일자로 지금의 태양입니다. 또 미네아키의 아키는 밝을 명자(해와 달)이고 가즈는 화합할 때 홧자입니다. 그러나까 애들의 이름을 합하면 해(저)와 달(쓰키하라)이 화합한다는 뜻이 됩니다. 애들 이름을 지을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즈가 태어났을 때 이미 우리의 화합은 예고돼 있었던 것입니다.

戻る